안녕하세요. 진료실 안팎에서 지역사회의 아픈 분들을 만나고 있는 야옹 선생입니다.
의사는 환자의 질병이나 건강상태를 진단하고 미리 예방하거나 치료하여 보다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의학적 지식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보와 감정을 전달하는 능력, 즉 말하는 능력도 필요합니다. 특히 환자들의 생활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말하는 전략과 지혜가 필요하고 심지어 연기력이 동원되기도 하지요.
종종 고혈압, 당뇨를 진단받은 환자들 중에 질병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귀찮거나 두려워서 약을 제대로 안 먹는 분들이 있습니다.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 게 두려워요. 내가 진짜 아픈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아직은 약 안 먹어도 괜찮은 것 같아요."
이전에는 환자에게 짜증을 내거나 무시했지만 저도 내공이 좀 쌓인 터라 환자와의 대화를 통해 대략의 성격과 심리상태를 가늠해 봅니다.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고혈압이란 말 그대로 혈관에 가해지는 피의 압력이 높아지는 것이고, 이 때문에 장기에 손상이 일어납니다.”
감정에 호소하는 게 필요한 상황이라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윽하게 쳐다보다)하...환자분, 사실 제가 너무 걱정되어서 그래요. 이대로 가면 정말 나중에 힘들어집니다.”
또는, 카리스마로 휘어잡아야 한다면 이렇게도 얘기하죠.
"(손을 덥석 잡고) 어르신, 저 믿으시죠? 제 말을 따라주세요."
물론 처음 봐서는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 쉽지는 않고 대부분 여러 가지 전략을 다 써 봐야 하지만, 마음과 시간을 들이면 결국 환자의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 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한 기술인 수사학을 집대성하며 세가지 요소를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성적 설득인 로고스(LOGOS), 감정적 설득인 파토스(PATHOS), 전달자의 공신력으로 설득하는 에토스(ETHOS)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갖기 힘든 것이 바로 에토스인데, 의사는 ‘의사’이기 때문에 에토스가 기본적으로 장착됩니다. 환자는 의사가 당연히 자신의 건강을 위해 애쓰는 의지를 가지고 도덕적이고 선한 마음으로 말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지요.
매달 혈압약을 처방 받으러 오시는 칠순 어르신 한 분이 계십니다. 평소 사교댄스를 즐기시고,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차에 모시고 다니는 외출 봉사 활동도 하시는 활달하고 귀여운 할머니입니다. 한번 들어오시면 저랑 말하는 게 좋으시다며 진료실을 나갈 줄을 모르십니다.
“나는 있지? 박선생을 만나서 얼마나 좋은지 몰러~ 어제는 내가 영양제를 하나 샀는데 말이여~ 이건 먹어도 되는겨? 언제 먹으면 돼요? 공복에 먹는게 좋은겨?”
성분표를 들여다보며 기존에 드시는 영양성분과 겹치는지 봐 드리고 설명하고 나면 다음 질문이 또 이어집니다. 궁금한 것도 많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많은 분이라 한번 진료를 보고 나면 진이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분은 제가 한번 말씀드리면 사소한 것 하나라도 기억하셨다가 실천하려고 노력하십니다. 심지어 제가 했는지 기억 못하는 말도 기억했다가 다시 물어보십니다.
제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의사’이기 때문에 칠순 할머니도 제 말에 귀 기울이시고, 팔순이 넘은 어르신들도 진료실에 들어올 때는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갓 의사면허를 따고 환자를 보기 시작했던 전공의 시절, ‘의사’라는 권위에 기대어 거들먹거리거나, 깍듯이 대해주던 분들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환자들이 의사에게 기대하는 지식과 도덕성, 선한 의지를 갖고 있는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이죠.
그냥 의사라서 받는 존중에 익숙해지지 않고, 저를 찾아 주시는 분들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식과 공감능력, 진심을 담은 말을 전달력 있게 하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를 존중해주시고 기꺼이 설득되어 주시는 환자분들께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3013015550341813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