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인 범용 씨는 그 중 대전 지역의 '한밭레츠'를 찾았다. 2000년 70여 명의 회원과 함께 시작한 '한밭레츠'는 2006년 2월 현재 598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2005년 한밭레츠 회원들 간의 거래 총액 1억2127만여 원 중 지역통화를 통한 거래액은 6515만여 원으로, 그 비율이 절반 이상인 53.7%에 이르고 있다. 실제 참여한 가구수로 나누면 가구당 평균 22만여 원어치의 지역통화를 사용한 셈이다.
범용 씨는 "1년에 가구당 평균 42만 원에 상당하는 물품이나 노동이 거래됐다는 현실은 다소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지역통화를 통한 개인과 지역의 변화는 주목할만한 점"이라고 말했다.
한때 전업주부였다가 현재 한밭레츠의 간사로 활동하고 있는 박현숙 씨나 '민들레 의료생협', 대안학교 '꽃피는 학교' 등 지역통화를 계기로 모여 스스로 대안적인 공동체를 형성해나가고 있는 한밭레츠의 회원들이 그같은 변화의 주인공들이다.
범용 씨는 "한밭레츠의 사례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지역통화가 개인의 무기력을 극복하고 사회적 관계를 복원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점"이라며 "지역통화는 공동체의 강화를 통해 사회공공성을 고양하는 데 일정한 효과가 낳고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 최근호에 실린 범용 씨의 글 전문이다. <편집자>
거래로 인한 소통과 관계의 힘
국내에서 지역통화는 1996년 3월 <녹색평론>에서 최초로 소개됐고, IMF 경제위기 직후인 1998년 3월에는 'FM'(future money, 미래화폐)이라는 지역통화가 '미내사'(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그 후 중앙대 부설 종합사회복지관의 '기술·도구은행', 관악주민연대의 '관악지역화폐', 탈학교 운동단체 '민들레'의 '교육통화' 등 다양한 실험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운영이 중단됐다.
현재는 '미내사' 이외에 대전 지역의 '한밭레츠', 광명 지역의 '광명그루', 과천 지역의 '과천품앗이' 등이 지역통화를 운영하고 있다. 한편 서울 송파구 자원봉사센터의 '송파품앗이', 대구 동구청의 '봉사품앗이' 등 지방정부 차원에서도 지역통화가 시도되고 있다. 여기서는 대전 지역의 '한밭레츠' 사례를 중심으로 지역통화의 가능성과 한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밭레츠'의 시작과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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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밭레츠는 1999년 10월부터 회원 모집을 시작해 2000년 2월 70여 명의 회원으로 창립했다. 당시 한밭레츠는 '널리 또는 두루두루'라는 뜻이 담긴 순수 우리말인 '두루'로 지역통화의 이름을 정하고, 회원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1000두루는 1000원에 해당하도록 두루와 원화의 가치를 동일하게 했다.
한밭레츠의 운영은 레츠 체계의 전형을 보여준다. 먼저 회원들은 한밭레츠 홈페이지(www.tjlets.or.kr)에 제공이 가능하거나 필요로 하는 물품과 노동의 목록을 올린다. 이를 통해 제공하려는 회원과 사용하려는 회원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거래를 한다. 그리고 회원들은 거래 내역을 등록소에 통보하며, 등록소는 회원들의 계정 및 거래내역을 통합 관리한다.
거래할 때 적자계정이 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거래금액 및 두루의 비율은 회원 상호간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한밭레츠는 거래 총액에서 두루가 차지하는 비율을 최소 30%로 다소 엄격하게 권장하고 있다. 두루의 사용을 권장하기 위해 가능한 한 현금 사용의 비중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와 관련, 초창기에 주유소 사장이었던 한 회원이 석유의 원가가 높다는 이유를 들어 5%만 두루로 거래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현금 사용 비중이 너무 커지게 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도 한다.
한편 한밭레츠의 운영을 위해서는 컴퓨터 등 사무집기의 구매나 전기료 등 공과금의 납부와 같이 현금이 꼭 필요한 경우가 있고, 상근자에게도 생계에 필요한 최소한의 현금을 지급해야 한다. 이에 대해 한밭레츠는 회원들의 회비와 후원, 사업수익 등으로 이를 조달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최초 회원 등록 시 가입비를 받고 매 거래마다 거래액의 5%를 수수료로 공제했는데 현재는 거래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가입비와 수수료 제도가 폐지된 상태다.
경제적 이득이 크지는 않지만
2006년 2월 현재 한밭레츠 회원은 598명, 계정은 모두 514개다. 회원 수와 계정 수가 차이 나는 이유는 1가구 구성원들이 1개의 계정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립 당시 70여 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회원 수가 6년간 8배 이상 증가했음을 알 수 있으나, 회원 규모가 크다고는 볼 수 없다. 특히 514가구 중 지난해 한 번 이상 거래를 한 가구는 289가구이기 때문에 실제 두루를 사용하는 가구는 300가구가 조금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거래의 규모다. 지난해 한밭레츠 회원들 간의 거래 회수는 4745건이며, 거래 총액은 1억2127만여 원이었다. 거래 총액 중 두루 거래액은 6515만여 원으로, 두루의 비율은 53.7%에 이르고 있다. 두루 거래액을 실제 거래에 참여한 가구의 수로 나누면, 가구당 평균 22만여 원어치의 두루를 사용한 셈이 된다.
물론 이 수치는 어디까지나 계산상의 평균값이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두루를 통해 매우 빈번하게 거래를 함으로써 필요한 물품과 노동을 공동체로부터 충분히 공급받고 있는 가구가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부족한 현금을 두루로 메움으로써 거래가 성사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두루 거래액보다는 거래 총액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리고 두루 사용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거래가 더욱 활성화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을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을 모두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1년에 가구 평균 22만여 두루로 42만 원에 상당하는 물품이나 노동을 이용했다는 현실은 다소 실망스럽다. 흔히 지역통화는 '돈'이 없어도 공동체로부터 필요한 물품이나 노동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데, 한밭레츠의 사례에서는 필요한 물품과 노동을 공동체로부터 충분히 지원받았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생각이 바뀌고, 삶은 튼튼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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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지 반(反)빈곤의 대안으로서 지역통화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한밭레츠 두루지기 박현숙 씨는 난감해했다. 그러면서 아래의 이야기로 대답을 갈음했다.
"실업으로 계속 쉬고 있는 사람은 위축될 수밖에 없고 자신감도 상실하고 끝내 자기비하를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레츠 안으로 들어오면 자신감을 얻는 데 도움이 됩니다. 기술력이 있는 경우 자신의 기술을 계속 활용할 수 있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일자리를 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집안에서 자녀 키우고 살림하다 보면 사회에 나가는 것이 두렵게 됩니다. 이럴 때 레츠는 자원활동, 자기계발, 공부 등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로 나가는 통로 역할을 하게 되죠."
이어진 현숙 씨의 이야기는 과거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현숙 씨가 한밭레츠를 처음 접한 때는 2002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숙 씨는 한밭레츠에 대해 전해들은 바로 그날 당장 한밭레츠에 가입한 후 지역통화 거래를 시작하다 자원활동을 한 후, 2004년 1월부터 지금까지 두루지기를 하며 한밭레츠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다.
"처음에는 현금이 덜 들어간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참여했는데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되었죠." 현숙 씨의 경험은 지역통화가 한 개인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공동체를 강화하여 대안을 만든다
지역통화는 경제적 관점만으로 평가되어선 안 되며 지역통화의 이득을 개인적 차원으로 국한시켜도 안 된다. 우리가 지역통화를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복원되고 그럼으로써 공동체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한밭레츠는 공동체의 강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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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밭레츠가 창립되던 2000년 한국사회는 의사파업으로 커다란 홍역을 앓았다. 의사파업을 계기로 기존의 의료체계가 지역 주민의 참여 아래 지역 주민의 건강권을 적절히 보장하는 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에 따라 대전 지역에서는 2002년 4월 '민들레 의료생협'이 만들어졌는데, 의료생협이란 의료, 건강, 생활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 주민과 의료인이 함께 하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 하나다.
그런데 '민들레 의료생협' 창립 당시 조합원 303명 중 150여 명이 한밭레츠 회원이었다. 한밭레츠가 만들어 놓은 사람 간의 관계가 없었다면 '민들레 의료생협'은 그렇게 빨리 창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2004년 4월에는 '꽃피는학교'(구 푸른숲학교)라는 대안학교가 세워졌는데, 애초 공동육아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던 한밭레츠 회원들이 '대전지역에 대안학교를 만들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개교한 것이라고 한다. 한밭레츠가 만들어 놓은 든든한 인간관계가 또 하나의 대안을 잉태한 것이다.
한편, 한밭레츠 회원이 중심이 되어 유기농 밑반찬 마련, 주말농장, 된장·고추장 공동 제작 등을 목표로 '두루부엌'이라는 생협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성공하지는 못한 사례도 있었다.
"사람들 간의 신뢰, 관계, 환경 등과 같은 시장경제가 놓치는 부분들을 지역화폐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수없는 거래로 인한 소통과 관계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고 이것이 밑바탕이 되어서 (공동체가) 커 가는 것입니다." 한밭레츠가 만들어 가는 다양한 시도들에 대한 현숙 씨의 평가다.
反빈곤의 대안으로서 '한밭레츠'
빈곤이란 단지 저소득에 머무르지 않고 개인의 무기력과 사회적 관계의 배제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는 노동권, 건강권, 교육권 등 총체적인 인권침해로 이어진다. 한밭레츠의 사례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지역통화가 개인의 무기력을 극복하고 사회적 관계를 복원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점이다. 나아가 지역통화는 공동체의 강화를 통해 사회공공성을 고양하는 데 일정한 효과가 낳고 있다.
예를 들어 '민들레 의료생협'에서는 두루 사용이 가능하며, 특히 처방전 등은 전액 두루로 지불할 수 있다. 그리고 한밭레츠의 가맹 약국들도 처방전에 대해서는 전액 두루로 받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한밭레츠 회원들은 적어도 병원 처방에 한해서는 '돈' 한 푼 없이 진료가 가능하고 다른 진료에 대해서도 두루를 사용함으로써 현금 사용을 줄일 수 있다. 이는 한밭레츠 안에서 제한적이나마 무상의료가 실현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역통화 안에서 물품과 노동을 제공하는 몫은 전적으로 회원들 개개인에게 맡겨져 있고 이는 필수적인 사회서비스가 공동체 내에서 제공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역통화를 통해 강화된 인적 관계망은 공동체 내에서 필수적인 사회서비스의 제공이 가능한 대안들을 시도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된다. 이것이 한밭레츠를 통해 주목해야 할 지역통화의 가장 큰 가능성이 아닐까.
이글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발행하는 <인권오름> 24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