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외롭다. 내 몸의 고통은 온전히 내 몫이다. 누구에게 덜어주거나 누구와 공유할 수 없다.
긴 병은 관계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날 떠날 때 느끼는 맘의 고통이 몸의 고통보다 크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험에 가입하고 돈을 모은다.
여기 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의료생협 사람들은 “건강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몸의 고통은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어도 경제적, 심리적 고통은 여럿이 나누면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원주시에서 혼자 사는 이아무개 할머니는 지난해 1월 심장의 혈관을 이어주는 큰 수술을 받았다. 당뇨병 때문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라 응급수술비는 정부 지원을 받았다. 입원비가 문제였다. 큰 수술이라 한달 이상 입원해야 했지만 정부는 입원비까지는 지원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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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원주 밝음의원 직원들과 고객들이 나섰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 이 할머니의 입원비를 대신 냈다.
내가 다니던 동네 의원이 나 대신 공짜로 수술 받는 법을 알아봐주고 입원비를 대신 내주는 일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웃사촌 같은 병원, 원주시 밝음의원과 밝음한의원을 지난 16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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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음신협은 생협, 비영리단체에
건물을 저렴하게 임대하면서 지역의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이경숙 |
원주시 중앙동에 자리 잡은 밝음신협 건물 3층. 밝음의원, 밝음한의원은 겉보기엔 여느 병원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양의와 한의가 한 병원에서 옆방 이웃으로 사이 좋게 진료하고 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접수대 곁 진열대를 보니 십여 종이 넘는 유인물이 꽂혀 있었다. ‘집으로 찾아가는 돌봄서비스, 길동무와 상의하세요’, ‘원주를 유전자조작(GMO) 안전지대로’, ‘원주 나눔의 집 소식지’ 등 시민단체 사무실에서 볼 듯한 제목들이다.
유인물 앞에 A4용지를 반으로 잘라 만든 ‘조합원 가입 신청서’가 놓여 있었다. ‘출자좌수, 기본 3구좌 3만원 이상.’
“조합가입비 3만원만 내면 내 주치의, 내 병원이 생기는 것이지요.”
김애경 원주의료생협 교육이사가 계속 설명했다.
“한의원을 찾아오셨더라도 양의의 진료가 필요한 분이라면 바로 옆 양의한테 진료를 받으실 수 있어요. 조합원은 수면내시경, 한약비 같이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20% 정도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지요.”
3만원만 내면 내 병원에서 내게 필요한 진료에 할인혜택까지 받는다? 어지간한 프리미엄급 신용카드 서비스보다 나아 보인다.
밝음의원, 밝음한의원은 원주의료생협이 운영하는 의료기관이다. 1260여 세대의 조합원이 1억7000여만원을 출자해 의료기기 등 기본자산을 마련했다. 조합원 다수는 30~40대다.
김 이사는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자고 생각하기 때문에 젊은 세대들이 조합원으로 더 많이 가입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원주의료생협은 ‘밝음 요가교실’, ‘웃기는 사랑방, ‘거북이산악회’, ‘당뇨병모임’ 등 여러 가지 건강소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소모임들을 통해 조합원들은 의료인들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의학지식을 배우거나 등산, 요가 등 자신에게 맞는 활동을 꾸준히 함께 즐긴다.
그래선지 밝음병원, 밝음한의원을 이용하는 사람 중 조합원은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그만큼 조합원들의 건강이 잘 지켜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병원은 건강을 되찾기 위해 존재하면서 동시에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많아야 돈을 버는 야릇한 '숙명'을 가진 곳이 아니던가. 아무리 '병원의 주인'이라고 하지만 조합원들의 건강을 우선시하다보면 수익은 놓치기 쉬울 터.
김 이사에게 캐물으니 의료생협 병원 의료진과 직원들의 급여가 다른 병원보다 적다. 특히 의사들의 급여는 다른 의사들의 절반 수준이다.
소신 있는 의료진을 확보하지 못하면 의료생협의 병원은 유지되기가 어렵다. 때문에 원주 외 다른 지역 의료생협에는 양방 의사가 없는 곳도 있다. 원주도 2005년부터 1년여 동안 한방 의사만으로 병원이 운영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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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모 밝음의원 원장이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이경숙 |
2006년부터 밝음의원을 맡고 있는 양창모 밝음의원 원장은 "급여보다는 재미를 찾아", "대안적 의료시스템을 찾아" 원주로 왔다고 말했다. 그의 가족은 모두 서울에 산다.
"의사들끼리는 '3분 원칙'이라고 말해요. 진료시간 3분이 손익분기점이라는 뜻이죠. 여기선 10분, 20분씩 진료할 수 있어요. 기존 시스템에선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의 명함 뒷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건강은 좋은 삶, 좋은 마을 공동체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을 지켜가고 싶습니다."
양 원장처럼 소신 있는 의료인들, 자신의 건강권을 깨달은 조합원들은 느리지만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94년 안성에 첫 의료생협이 설립된 이래 의료생협은 11곳으로 증가했다. 조합원은 1만2000여 세대에 이른다. 현재 수원, 성남 지역에서도 의료생협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대안적 의료시스템에 대한 갈망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박봉희 의료생협연대 사무총장은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치료 중심이라 건강을 지키는 문제는 소비자인 나의 몫으로만 남는다”고 지적한다.
현재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의료진이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더 많은 약을 처방할수록 돈을 벌 수 있다.
22일 건강심사평가원은 국내 병원들이 약을 과다하게 처방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호흡기계 질환의 경우 국내 병원들은 평균 4.8개의 약을 처방했다. 한국의 처방당 약품목수는 4.16개로, 미국, 독일의 두배가 넘는다.
건강심사평가원은 “처방되는 약 개수가 많아지면 약물이상 반응과 상호작용으로 인해 문제가 일어날 수 있고, 약품비 지출부담도 늘어난다"고 우려했다.
특히 항생제 남용은 ‘약품 공해’의 수준이다. 항생제는 우리 몸에 해로운 균뿐 아니라 이로운 균까지 없앤다. 또, 강한 독성과 번식력의 내성균을 만들어낸다. 한국은 항생제 내성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이런 의료 시스템을 떠받치는 것은 의료서비스의 소비자들이다. 의료 지출비가 늘어날수록 사람들이 질병에 대비해 모아야할 돈, 보험비의 규모는 더욱 커진다. 게다가 우리 모두의 평균 수명은 길어지고 있다. 여명이 길어질수록 대비할 질병의 수는 많아진다.
‘고객이 곧 병원의 주인’인 의료생협은 주인의 건강과 함께 ‘주머니’를 생각한다. 즉, 병원 수익을 높이기 위해 과잉진료나 불필요한 처방을 하지 않는 것이다.
최혁진 원주의료생협 기획실장은 "지난해 밝음의원의 항생제 처방 비율은 10.7% 이하로, 원주 지역 평균치인 58%에 비하면 아주 낮은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한방 역시 비싼 한약 처방을 남용하지 않는다. '내 돈 내고 내가 지어 먹겠다는데 왜 안 지어주냐'고 항의해도 본인에게 필요 없으면 처방하지 않는다. 대신 정현우 밝음한의원 원장은 식이요법, 운동 등 일상 속 건강법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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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의료생협 의료진과 봉사자들이 지난해
원주 풍년대축제에서 무료로 검진활동을
펼치고 있다.ⓒ원주의료생협 |
지난해 10월, 원주의료생협은 노동부로부터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 고령자와 빈곤가정 건강 지원부터 문화복지 분야 사회적 일자리까지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드는 사업들을 더 보강했다.
덕분에 이 할머니 같은 분들이 원주의료생협을 통해 좀더 체계적인 도움을 얻게 됐다. 한편, 건강을 되찾은 이 할머니는 요즘 밝음의원을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면서 의료생협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원주의료생협 같은 기관이 우리 동네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쉽게도 의료생협은 서울, 인천, 대전, 전주, 울산 등 11곳에만 있다. 의료생협만 120곳이 넘는다는 일본이 부러울 지경이다.
당신의 행복지수는?
◇우리나라의 의료생협(자료 : 한국의료생협연대)
△안성의료생협 (031-676-3435)
△인천평화의료생협 (032-524-6911)
△안산의료생협 (031-401-2208)
△대전민들레의료생협 (042-638-9042)
△원주의료생협 (033-744-7572)
△서울의료생협 (02-848-2150)
△함께걸음의료생협 (02-937-5368)
△전주의료생협 (063-221-0525)
△울산예장의료생협 (052-227-5691)
△청주아올건강생협 (043-908-5471)
△용인의료생협 (031-337-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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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s://news.mt.co.kr/mtview.php?no=2008012909554963753&outlink=1&ref=https%3A%2F%2Fsear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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