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레츠 회원 김하동씨 농장의 포도주 담그기 행사에 참가한 한밭레츠 회원 가구의 아이들이 활짝 웃고 있다. <한밭레츠>
“반나절 동안 우리 아기 해솔이를 잘 돌봐준 리사에게 1만5000두루를 드립니다. 무한 감사하구요, 종종 봐주삼…”
지난해 12월 23일 ‘소슬바람’이라는 애칭을 쓰는 한 주부가 대전한밭레츠 거래 내역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이 주부는 아이를 봐준 대가로 ‘리사’라는 애칭의 회원에게 1만5000두루를 지급했다. 조금 다른 형태의 거래도 있다. 지난해 같은달 ‘외양간’이라는 이름의 회원은 ‘버들치’라는 회원이 만든 스카프를 사고 현금 2만 원과 1만 두루를 지급했다. 현금 2만 원은 버들치 통장으로 입금됐고 1만 두루는 ‘한밭레츠’ 등록소에 기록됐다.
83년 캐나다서 시작된 대안통화운동
대전시 대덕구 법1동에 자리잡은 지역화폐 운동체 한밭레츠의 홈페이지는 화폐를 중심축으로 움직이는 시장경제체제 안에서 시장경제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실험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곳이다. 2000년부터 시작한 이 새로운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장치는 ‘두루’라는 이름의 화폐다. ‘널리 또는 두루두루’라는 뜻의 순우리말인 두루는 금속이나 종이를 재료로 만드는 실제 화폐와 달리 크기와 모양을 갖지 않는 가상의 화폐다. 두루는 형태 없는 돈이기 때문에 집에 쌓아두거나 은행에 넣어둘 수 없고, 회원 간의 약속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한밭레츠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통용될 수 없는 무용지물이다.
회원 사이에 거래되는 모든 서비스와 물품에는 위의 두 사례가 보여주듯 현금과 두루의 조합으로 가치가 매겨진다. 서비스와 물품의 가치는 시장가격이 아니라 회원 사이의 ‘합의’를 통해 결정된다. 물론 최소한의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특정 서비스나 물품에 매기는 현금이나 두루의 가치는 시장가격을 참고한다. 회원이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와 물품의 목록은 정기적으로 홈페이지에 올려둔다. 거래가 끝나면 회원은 자발적으로 거래 내역을 전화나 전자우편 또는 홈페이지에 직접 올리는 방식으로 등록소에 통보한다. 등록소는 회원의 계정과 거래 내역을 통합해서 관리한다.
서비스나 물품의 성격에 따라 두루나 현금, 어느 하나로만 결제할 수 있지만 대개는 현금과 두루를 조합해서 사용한다. 가령 김장한 김치를 집까지 옮기는 데 어떤 회원이 도움을 주었을 때는 두루로만 지급하는 경우가 많고, 스카프 같은 물품을 산 경우에는 위 사례처럼 현금과 두루를 적당한 비율로 조합한다. 한밭레츠는 두루 사용을 촉진하기 위해 거래 시 두루의 비중을 30% 이상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현금과 두루의 교환가치는 1 대 1로 잡았다. 1000두루는 현금 1000원에 해당한다.
대전 한밭레츠 사무실에서 박현숙(왼쪽)씨와 이수정(오른쪽)씨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원식 기자>
한밭레츠는 1983년 캐나다 코목스 밸리라는 작은 광산촌에서 시작한 레츠운동의 한국판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마이클 린턴은 1980년대 초 경제불황을 지켜보면서 현금을 소유하지 않으면 경제 행위를 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지역통화시스템(LETS: 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을 만들었다. 지역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생산과 유통망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통화 시스템에서 자율적인 경제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레츠의 이념이었다. 코목스 밸리 레츠는 시작한 지 2년 만에 회원 500명, 달러 환산 거래량 30만 달러로 성장했다.
한밭레츠가 터를 잡고 있는 대전에 지역화폐운동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998년 9월 무렵이다. IMF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던 시기에 ‘대전의제21추진협의회’가 지속가능도시연구센터 박용남 소장과 대전 민들레의료생협 김성훈 사무실장을 중심으로 지역화폐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 시발점이다. 한밭레츠는 1999년 회원 모집을 시작해 2000년 2월 공식 출범했다.
10년 만에 국내 공동체 30여 개 생겨
2008년 2월 현재 한밭레츠 회원은 580가구다. 회원 가입은 원칙적으로는 대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한정하지만 금산, 영동, 논산 등 대전 근교의 농민들도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 회비는 5000원으로 이중 3000원은 현금으로, 2000원은 두루로 낸다. 2007년 한 해 동안 거래 건수는 7557건, 거래금액은 1억4000만 원가량이다. 이중 현금 거래는 6800만 원, 두루 거래가 7300만 원으로 두루 거래 비율이 51.7%다. 가장 활발하게 거래된 품목은 농산물과 의료다. 농산물은 전체 거래 가운데 21%, 의료는 19.4%였다.
회원 사이에 거래되는 서비스와 품목은 회원 개인의 능력과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가정주부들은 다 읽은 책이나 아이가 커 입지 못하게 된 옷이나 신발 등을, 외국어나 컴퓨터, 자동차 정비 같은 기술을 가진 회원들의 경우에는 해당 분야의 전문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 가진 게 빈 손뿐인 사람이라도 이사를 도와주고 두루를 얻을 수도 있다. 일종의 품앗이이자 공동체 내의 상부상조인 셈이다.
한밭레츠 박현숙 두루지기(관리자)는 “레츠의 장점은 수치로 계산할 수 없다”면서 “소비가 줄어든다든가 친환경적인 소비를 할 수 있다는 것 말고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을 바탕으로 하나의 지역공동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밭레츠 회원 중에는 한의원, 치과, 약국,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들은 가맹점 형태로 참여한다. 회원들은 의료 분야 가맹점을 이용할 경우 의료비의 15~50%를 두루로 지급할 수 있다.
지역화폐운동은 96년 <녹색평론>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98년 3월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이 ‘미래화폐(fm)’라는 이름으로 지역화폐운영을 시작한 이후 미래여성클럽, 불교환경교육원, 인하대 내 인천정보센터, 중앙대 부설 종합 사회복지관의 기술도구은행, 관악지역화폐, 경기 안양시 ‘고잔 품앗이’, 경남 진주시 ‘상봉레츠’, 녹색대학의 ‘녹색화폐사랑’, 광주의 ‘나누리’, 서울시 송파구의 ‘송파품앗이’, 녹색연합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작아장터’ 등 30여 개의 지역화폐운동이 생겨났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 국내 지역화폐운동의 성과는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힘든 수준이다. 박용남 소장은 “한때 30여 개 가까운 지역화폐운동이 생겨났지만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10여 곳 정도”라고 말했다. 기술도구은행, 관악지역화폐 등은 운영이 완전히 중단됐다. 박 소장은 “국내에는 지역화폐운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없어 정확한 통계도 내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지역화폐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데다 연구도 활발한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한국과 달리 해외선 활발히 유통
지역화폐운동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국내와 달리 해외에서는 지역화폐운동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대안통화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대전 한밭레츠 회원들이 두루공동체 교실에서 애니어그램 강좌를 듣고 있다. <한밭레츠>
일본에서는 1990년대부터 ‘에코 머니’라는 이름의 지역화폐가 300여 곳에서 활발히 유통되고 있다. 2004년 도쿄 와세다, 다카다노바 지역에서 만들어진 ‘아톰 통화’는 두루와 달리 만화영화 주인공 아톰의 디자인이 새겨진 유형 화폐다. 가맹점은 200여 곳이고, 가맹점에서 쇼핑할 때 얻은 가방을 반납하는 것만으로도 아톰 통화를 얻을 수 있다. 일본의 지역화폐운동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장기적인 경기 침체와 세계화가 초래한 불공정한 경제시스템이 그 배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주도 레츠가 활성화된 나라다. 호주에는 200개 이상의 레츠그룹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그중 4분의 1가량은 호주 서부에 자리잡고 있다. 91년 시작한 시드니 서부의 블루 마운틴 레츠는 회원 수 2000명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레츠로 알려져 있다.
지역화폐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실제 화폐 형태로 유통되는 형식이다. 미국 뉴욕의 이타카 시에서 폴 글로버가 만든 ‘이타카 아워’가 대표적으로 직접 인쇄해서 실제 화폐 형태로 발행한다. 메사추세츠주 서부지역에서 사용하는 버크셰어는 정교한 디자인의 화폐로 5개 지역은행 12개 지점에서 발행한다. 둘째, 전표나 수표 등을 보완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브라질의 생태도시 꾸리찌바나 영국과 헝가리 일부 지역에서 사용한다. 가령 1971년 꾸리찌바에서는 쓰레기를 종류별로 분리해서 한 봉지 가득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버스표를 하나씩 주었다. 셋째, 두루처럼 화폐나 전표 없이 등록소에서 관리하는 가상화폐다. 에드거 칸 교수가 은퇴자들의 가정이나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위해 개발해 시카고를 비롯한 미국의 몇몇 도시에서 운영 중인 타임달러 시스템이 여기에 해당한다. 영국의 대표적인 지역화폐인 루스 파운드와 토튼스 파운드의 경우에는 일반 화폐처럼 세금이 붙는 경우도 있다.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지역화폐는 세계화와 기후변화라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지역통화를 뒷받침하는 힘은 지역화운동이다. 국가 경제나 글로벌 경제에서 초래되는 불안정성이나 환경과 공동체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제어하는 것이 지역통화의 이상이다. <꿈의 도시 꾸리찌바>의 저자이기도 한 박용남 소장은 “세계화는 기후 파괴, 공동체 파괴, 환경 파괴라는 재앙을 던지고 있다”면서 “지역화의 필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으며 지역화폐는 이 목표를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출처:주간경향 [트렌드]지역화폐운동 대전에서 ‘무럭무럭’ - 주간경향 (khan.co.kr)